최규엽이 살아온 길

최규엽이 살아온길

  • 1고문과 밥

    내가 고문을 처음 받아 본 것은 전주 고등학교 3학년 시절 유신헌법 반대데모로 전주경찰서 반공분실 지하에서 조사를 받을 때이다. 기본적으로 고문이라는 것은 피고문자에게 수치심과 고통 그리고 생명에 대한 위협을 실질적으로 가함으로써 피고문자의 인간성을 박탈하고 모든 자존심을 상실케 함으로써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잔인한 수단이다.

    고문을 한 뒤에 그들이 하는 일은 달래기 조가 따로 있어서 밥도 주고 심지어 약도 발라주기도 한다. 지극히 고립된 조건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나에게 따듯한 위로의 말과 밥한그릇은 오히려 고문 받을 때보다도 더욱더 마음을 약하게 만든다. 나는 고문조와 달래기 조가 조직적으로 교묘하게 따로 움직인다는 것을 1981년 소위 전민노련 사건으로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받을 때 알았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는 나에게 따뜻한 밥 한그릇은 살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고, 이 사람들이 나를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라는 희망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고문 뒤에 가장 반가운 것이 "밥"이다.

    1980년 6월 광주민중항쟁 서울확대사건에 연루되어 성북 경찰서에 잡혀가자 마자 오후 8시부터 오전 7시까지 통닭구이 물고문부터 시작해서 날이 샐 때까지 온 몸에 구타를 당했다. 때릴 곳이 없으니까 나중에는 발바닥까지 때려서 유치장에 걸어가지 못하고 부축을 받고 기어 가다시피 겨우 갔다. 사람이 많이 맞으면 나중에는 아픈지도 모른다. 탈진이 되어서 일어날 수도 없었고 밥을 먹기도 힘들었다. 그 다음 날 정보과 형사가 유치장까지 찾아와서 따듯한 말로 위로 하고 사식 한 그릇 권하면서 파스를 발라주며 선배의 거처를 실토하라고 이야길 할 때 정말 그 순간은 어려웠다. 나는 밥을 개걸스럽게 먹으면서 내가 선배의 거처를 정말 몰라서 망정이었지 내가 만약 경찰이 요구하는 선배의 거처를 알았다면 당장 불었을 것이다.

    1981년 남영동에서 고문수사를 받을 때도 실컷 죽여놓고 밥 한그릇 주면서 " 왜 이 고생이냐 마음만 바꿔 먹으면 출세도 할 수 있는 사람이 말이야 부모님도 생각해야 되지 않느냐"면서 달랠 때 그리고 다시 고문을 하겠다고 위협할 때가 정말 견디기 어려웠고 이 때는 실제 실수도 한적이 있었다. 이처럼 나는 앞의 세차례의 고문수사에서 '적'이 주는 밥 한그릇에 이미 무너져 가고 있었던 자존심이 그 자리에서 완전히 무너졌다. 그 후 나는 내가 변혁운동을 하려면 고문에 굴복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고문을 극복할 수 없는 한 운동을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실 이 당시 고문때문에 운동을 그 만 둔 사람들이 많았다. 고문을 극복하려면 죽을 각오를 해야하고 죽을 각오가 되어 있으면 고문수사기관에서 조사를 받을 때 밥을 먹어서는 안된다고 결심했었다. 나는 이 생각을 가지고 다시 운동을 시작했다.

    1987년 12월 서울남부지역 노동자연맹 사건으로 나는 당시 제일 잔인하다는 '보안사령부'에 잡혀갔다. 당시 이 사람들은 나만 잡아 간 것이 아니라 우리 어머니, 나의 아내, 당시 3살 먹은 우리 아들까지 같이 연행해 갔고, 연행 과정에서 우리 어머니에게 욕설까지 퍼부었다. 어머니와 애는 바로 내 보냈지만 아내는 내보내지 않았다. 잡혀가자 마자 한 바탕 코스를 밟았다. 온 몸 폭행 뒤 - 물 고문-전기고문- 나는 죽어도 살려달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다 끝내고 나더니 전통적인 달래기 수법을 썼다. 김이 모락 모락 나는 설농탕이었다. 설농탕을 본 순간 지금이야말로 내가 전두환 독재정권에게, 고문수사관들에게 그 동안 당한 모욕과 굴욕을 말끔히 씻어낼 때라 생각했다. 나는 박영지동지가 분신투쟁으로 죽은 후에 정말 많은 반성을 했다. 이제는 정말 죽어야 한다. 죽지 않고는 안된다. 죽을 때가 오면 멋있게 깨끗이 죽자. 그리고 살아있다는 것이 어느 때는 부끄러웠다. 나는 보안사 놈들에게 단식투쟁을 선언했다. 죽이라고 소리쳤다. 그 때 이 놈들은 깜짝 놀라면서 눈들이 휘둥그레 해지면서 열었던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 2그 후 이들은 나에 대한 수사를 포기하고 다른 수사기관으로 나를 이첩하고 말았다. 그 이외에 감옥을 세차례 들락거리면서 단식도 많이 했고 단식 후 죽 한 그릇에 얽힌 사연들은 민주화운동으로 감옥 갔다온 많은 동지들이 제 각기 갖고 있을 터이에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기로 한다. 

    다만 덧 붙여 꼭 하고 싶은 애기는 이북동포들의 고난의 행군시기의 굶주림과 체제 그리고 춤과 노래 이야기이다. 나는 내 귀로 직접 들었고 내 눈으로 직접 보았다. 가장 심한 경우는 2천만동포들이, 평양시민이고 농촌주민이고 할 것 없이 어른 들은 하루에 한 끼씩 먹고 거의 1년 가까이의 배고픔을 참아 냈다고 한다. 그런데도 데모도 없었고 항의도 없었다고 한다. 나는 이 말을 듣고 1980년 광주항쟁시기에 시민군들이 공수부대를 몰아낸 후 해방광주였을 때 밥도 똑같이 나눠 먹고 하면서 어떠한 혼란도 없었고 슈퍼마켓 하나 털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세계역사에 2천만의 인간들이 하루에 한끼씩 먹고 어떠한 혼란도 없이 1년을 버텼던 사실이 있었던가? 정말 연구해 봐야 할일이다. 이북체제를 간단히 쉽게 재단할 일이 아닌 것 같다. 그들고문 후 밥그릇을 걷어 찬 놈은 배고픔을 참기 위해서 밥먹는 시간에 여럿이 같이 모여서 노래 부르고 춤을 추었다 한다. 2000년 10월 10일 밤 그들은 그 넓은 광장에서 우리에게 수 많은 춤을 보여주고 있었다. 계속 계속 그 많은 춤들을 이제 밥은 먹으면서 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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